손 안에 꽉 차는 구슬은 반드시 곤튠산에서 캐내고 잘 딜리는 천리마는 반드시 기주(冀州)로부터 나온다 한다。그러므로 단술샘이 반드시 근원이 있고 지초(芝草)는 그 뿌리가 있다 하는데 과연 공(公)께서 그러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고려에 들어오매 휘 빈(邠)이 계셔서 문장으로써 세상에 울렸었고 별호는 초당(草堂) 이시니 이 분이 공의 먼 조상이요、임진왜란에 이르러서 익사공신이신 휘 치명(致明)의 아드님이시다。공의 이름은 초선(楚璿)이요、자(字)는 여제(汝濟)이시니 선조 병오 七월 七일에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두리(지금 龍洞里) 본집에서 나시었다。천품이 영리하고 재주가 비범하였다。참됨을 기르고 맑음을 깊이 하시매 간사한 사물은 눈에 가까이 않고 속된 말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으며 물욕과 화려한 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으셨다。항상 사람을 대하매 어진 뜻이 외모에 까지 나타났고 재주는 문무를 경하여 가장 병서(兵書) 읽기를 좋아하시매 항상 새벽과 저녁으로 쇠소리를 내어 읽으셨으나 남들은 그 소리가 듣기 좋음만 알았지 어느 책을 읽는지 그 뜻을 알아 듣는 이가 없었다。 명종 정축 八월에 용호방(龍虎榜‥武科)에 급제하여 여러 고을 찰방을 봉직(累典郵驛)하시매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푸사 원근이 모두 칭송하였고 일만 사람의 입이 비석을 이루었다. 순치(順治) 十八년에 현신교위(顯信校尉)가 되어 경흥진(慶興鎮)을 지킬 새 오랑캐를 다스리는 병마만호(兵馬萬戶)를 관장하셨고 인조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갑자기 당하매 백번 싸운 끝에 형세가 궁하고 힘이 굽혔으되 병기(兵器)가 없어지게 되매 이르러서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호위하고 심양(지금의 중국 奉天)에 인질로 억류되어 여러 해를 지내시매 주야로 충성을 다하여 온갖 고생을맛보셨으니 일찍이 개자(介子)가 다리를 깎았다 함이 혼자서만 옛날에 휼륭하였던 것이 아니고 인동(印翁)의 저항정신을 오히려 여기에서 지금 다시 보겠도다。『의관(衣冠)이 만리 밖에서 모습이 늙었고 명성은 천추(千秋)에도 해와 달빛갈이 걸려있구나(衣冠萬里風光老 名節 千秋日月懸)』라고 한 글귀가 정히 이릍 이름이로다。 소현세자를 모시고 돌아올제 압록강에 이르러서는 슬픈 낯빛으로 동료군관(同僚軍官)이었던 김여준(金余俊)의 명월비안지곡(明月飛鴈之曲)을 회상하고 시(詩)를 읊어서 이르기를『용이 일어나면 진(晉)나라의 물이 맑음을 듣게 되는데 말의 머리가 오늘은 동으로 향하여 가누나 심양땅의 바람과 눈 속에서도 몸은 오히려 건장하니 한양의 산천에 눈빛이 다시 밝아지리 한밤중에도 와신상담을 어찌 감히 잊으랴、지나온 해의 가진 절개에 또한 능히 살아서 돝아오네、월명비안곡에 화답코저 하매 고인은 보이지 않 고 눈물만이 갓끈에 적시네(龍起性聞晉水清 馬頭今日向東鳴 瀋陽風雪身猶健 漢上山川 眼更明 中夜臥薪那敢忘 經年持節亦能生 欲和明月飛鴈曲 故人不見淚沾纓)』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일찍이 심양에 갔던 동료 김여준이 부른 월명비안곡으로서 자리에 앉았던 여러 사람이 눈물을 홀렸으니 이제 그 사람은 불행히도 이미 죽어서 함께 돌아오지 못하므로 눈물이 갓끈을 적신다고 하였음이니 늠름한 그 기상과 슬픈 그 정이 시 가운데에 넘쳐서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하매 비록 천품이 남보다 달랐다 하나 또한 가풍에서 절로 나온 것이니 사람들이 이르기를『한(漢)나라의 충무공이 가히 그 휼륭한 아들이 있다』고 한 것이 오늘의 경흥공(휘 楚璿공율 뜻함)이 또한 가히 아들이 있다고 이릍 만하도다。 아버지는 충의로써 남한산성에서 익사공신이었고 아들도 절개와 의리로써 심양까지 호종(扈從)하셨으니 한 가문의 충렬한 가풍이 지금까지 늠름하도다。그 후 효종대왕께서 그 충성율 천명코져 교시(下敎)를 내려서 여러번 부르셨으나 병환으로 가시지 못하셨으니 그 또한 하늘의 뜻인저! 그 후손 종화(鍾華) 종황(鍾黃)이 두 분의 二대 문헌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한 말씀을 청하므로 二대의 충절을 흠모하여 글을 못함에도 간략히 그 대개를 적어서 이르는 바이다。 서기 一九三六年 丙子 四月 二十入日 海州 吳震泳 記